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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아리 수성은 행성이 아닙니다.

방금 전. 2023. 7. 10.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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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모아리 수성에 대해서 한 번 정리하려고 합니다. 사모아리 수성은 사실 사묘아리라고 합니다. 왜 사묘아리라고 말하냐고 물으신다면 대답 해줘야 하는 게 인지 상정입니다. 과거 서적에 사묘아리전이라는 책이 발견됐습니다. 그 안에 금사라는 목차 안에 사묘아리 수성이 어떤 업적을 달성했는지 자세하게 나오는데요. 그래서 사모아리 수성이라는 말보다 사묘아리 수성이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사모아리 수성
사모아리 수성

사모아리 수성
  • 사모아리 수성은 왜 수성이라고 불리었을까?
  • 사모아리 수성은 어느 나라 사람이었나요?
  • 고려군의 최종 병기였던 척준경과 사묘아리와의 대결

사모아리 수성은 왜 수성이라고 불리었을까?

여진족의 장수로 고려, 남송, 거란을 상대로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명장이자 고려의 척준경, 송나라의 한세충과 동시대에 활약한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전투를 보면 알겠지만 육지와 해상 모두에서 패배한 적이 없을 정도로 다재다능한 장수로서, 외려 후반부 행적은 수군 장수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출생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금사에 따르면 아버지 혼탄(渾坦)을 따라 귀순한 인물이라고 나옵니다.

그 전부터 수차례 전공을 세우며 이름을 알렸다고 하니 유년기 부터 전쟁터를 누빈 인물로 보입니다. 17세가 되었을 때 그의 백부인 호마곡(胡麻谷)을 따라서 사도를 공격해 사도의 동생이었던 사리지를 포로로 잡는 전공을 세운입니다. 책 사묘아리전의 금사라는 항목에서 사묘아리를 수성이라고 부릅니다. 사묘아리는 스스로 머리를 묶고 종군하였는데, 크고 작은 수십 번의 전투를 치렀으며, 더욱 수군에 관한 것을 익혀 강주와 회주에서 군사를 부렸으며, 그 어떤 부역에도 따르지 않는 것이 없으니, 그 당시 사람들이 수성(水星)이라 일컬었습니다. 질리부 절도사로 삼았으며, 순의와 태녕군을 다스리다 귀덕윤과 제남윤에 임명되었다고 나옵니다.

 


사모아리 수성은 어느 나라 사람이었나요?

위에서 언급됐긋이 사모아리 수성은 여진족이었습니다. 고려가 윤관을 앞세워 17만의 대군과 함께 여진족 정벌을 시도하자 이를 막아내기 위해 아버지 혼탄과 함께 참전, 목리문전(木里門甸)이라는 장소에서 고려군과의 교전이 벌어졌을 때 고려군 측 장수를 창으로 찔러 죽였고 이에 여진의 사기가 올라 고려군을 패퇴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이후 석적환(石適歡)의 병력과 합류하게 되고 사묘아리는 선봉에 서서 고려군을 박살내버리며 2개 성을 빼앗는데 성공합니다. 이후 이를 탈환하기 위해 5만의 고려군이 공격했으나 사묘아리의 방비에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퇴각하게 됩니다. 이때 사묘아리는 퇴각하는 고려군의 후미를 따라가 갈라수(曷懶水)에서 7만의 고려군과 조우해 하루동안 3차례의 대규모 회전을 치르며 고려군을 상대로 승리합니다. 참고로 당시 고려군 최종 병기였던 척준경은 이곳에 있었는지, 개성에 있었는지 기록에 나타나지 않아 알 수 없습니다. 갈라수에서의 큰 승리를 거둔 이후 사묘아리는 타길성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하며 고려의 여진 정벌계획을 무너트리는 데 일조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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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아리 수성 갈라수 전투
사모아리 수성 갈라수 전투

고려군의 최종 병기인 척준경과 사묘아리 수성의 대결

동시대에 활약한 명장이었던 한세충, 척준경과 달리 말년도 평안하게 보냈습니다. 비록 말년에 해릉양왕이 재위했지만 재임 초에 해릉양왕은 그 막장을 아직 잘 드러내지 않고 있었기에 그야말로 천수를 누리다 간 것입니다. 당시 척준경이 맹활약한 고려의 여진 정벌 당시 여진족의 선봉장 중 한명으로 맹활약 했기에 현대에 들어와서는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두 사람의 맞대결을 하면 누가 이겼을까하는 논쟁이 가끔 벌어지기도 합니다. 고려군과 여진족 간의 대규모 회전이 벌어진 갈라수 전투에서 당시 척준경의 행방이 묘연하기 때문에 실제로 맞붙었는 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사모아리 수성 전적

  • 완안부 9대 추장 영가 때 아버지 혼탄이 완안부에 귀부 17세 사도 토벌전에서 사도의 동생 사리지를 잡았습니다.
  • 대 고려전 : 목리문전에서 고려군과 오랫동안 싸움, 목리문전에서 고려군에 난입하여 장수를 죽이니 고려군이 궤멸, 도문수에서 선봉장으로 고려군을 격파하고 2성을 함락. 고려가 공격해 오자 요해처를 수비하다 고려가 철군하자 갈라수까지 추격하여 고려군을 격파함, 고려군 5만과 조우하여 격파, 같은 날 고려군 7만과 또 조우하여 격파, 고려의 타길성 공성전에서 성벽을 뚫어 성을 함락했습니다.
  • 대 거란전 : 태조를 따라 거란의 영강주를 함락하고 맹안(병력 1천)을 수여받음, 거란 신주, 빈주 함락, 홀사리성을 공격하는 요군 수만 명을 겨우 100기로 계략을 부려 철군시킴, 항복했다가 다시 배신한 소주와 복주의 10만 반란군과 10여 차례 싸워 격파하여 강물을 시체로 막히게 함. 거란과 해족이 1000척의 배로 바다로 도주하자 27척을 이끌고 추격함, 화살에 2번 맞아 생사가 위태로웠으나 힘껏 싸워 도주한 거란족과 해족을 격파하고 배를 모두 획득함. 소주, 복주, 파속로 평정. 현주, 영산현, 양어무 함락. 야율여도의 거란군 격파, 거란 소고아 + 구근의 병력 수만을 8모극 800명으로 격파함. 장각 토벌전에서 누봉구의 잔당 처리, 평주 함락합니다.
  • 대 송나라전 : 1차 개봉 포위전에서 교각을 확보하고 황하를 건넘. 2차 개봉 포위전에서 보주, 중산, 진정 함락.. 황하를 건너 북송군 400을 죽이고 개봉 포위 참여. 야밤에 북송군 1만이 급습하였으나 이를 격퇴, 회군하면서 조주 항복시킴. 1128년 남송 토벌전에서 양곡현, 신현 함락. 해주 남송군 8만 명 격파. 양산박에서 남송 수군 1만 척 격파. 등양, 동평, 태산 도적떼 항복시킴. 도적떼가 범현을 공격하자 격퇴하고 배 700척 획득.. 수춘을 항복시키고 회수의 상류에서 배 준비, 당해 + 대고와 함께 회남에서 남송군 10만 격파, 배 200척 획득. 광덕군 항복시킴, 항주의 남송 복병 2천 격파. 포로혼과 함께 정병 4천으로 동관, 고교진 함락. 남송 고종이 명주로 달아나자 명주를 공격하였으나 큰 손실을 입음, 남송 고종이 바다로 도주하자 여요로 철군. 당해와 더불어 명주를 함락하고 조백악을 사로잡음. 남송 고종이 있는 창국현으로 갔으나 고종은 온주로 도주 사묘아리가 바닷길로 300리를 추격하였으나 실패. 명주를 무너뜨리고 회군. 종요의 섬서 공략전에 1맹안(1천명)을 이끌고 참여해 위주 함락.
  • 말년 : 1134년 수운로 감독 박주, 하로에서 남송 수군 격파, 60리를 추격하여 소통을 사로잡음. 연수 수채의 남송 수군 격파. 1138년 ~ 1140년 사이에 석주의 도적떼 토벌. 종필의 남송 정벌전에는 이미 늙어 참전치 못하고 군선 건조 감독함. 남송이 칭신하고 재물을 바치자 희종은 사묘아리에게 천만전을 하사함.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은 사모아리 수성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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