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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군사반란 실제 내용 정리 및 영화 서울의 봄.

방금 전. 2023. 12. 24.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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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2.12군사반란의 실제 기록된 사실과 영화 서울의 봄의 정보를 모두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궁금하신 분을 위해서 12.12군사반란과 영화 서울의 봄의 정보를 모두 분석한 역사학자의 영상도 준비했습니다.

12.12군사반란 영화 서울의 봄.

12.12군사반란.

11979년 12월 12일에 발생한 군사 반란 사건은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이 중심이 되어 정승화 육군 참모 총장을 불법적으로 강제 연행하고 군권을 장악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신군부 세력이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확대하며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12·12 군사반란에 대한 진상은 김영삼 정부 아래에서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로 평가되었습니다.

개요는 이렇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신군부가 정승화 육군 참모 총장을 불법으로 연행하고 군사력을 장악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신군부는 군본부, 국방부, 중앙청, 경복궁 등 핵심 거점을 점령하고 언론을 통제했습니다. 당시 최규하 대통령에게 승인을 받으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전두환은 1980년 9월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고, 이후 제5공화국이 시작되었습니다. 12·12 군사반란의 진실은 김영삼 정부 시절에 밝혀졌습니다.

12.12군사반란의 배경은 박정희 대통령 암살 후,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은 군 내부개혁을 시도했습니다. 이에 불만을 가진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군사 쿠데타를 감행해 군권을 탈취하였습니다.

12.12군사반란의 전개는 12월 12일 저녁, 전두환 본부장은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의 강제 연행을 지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신군부는 큰 저항 없이 쿠데타를 성공시켰으며, 최규하 대통령에게 연행 승인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습니다. 12·12 군사반란 이후에는 1980년 1월, 신군부는 정승화 참모총장의 추종세력을 제거하고 정승화 총장에게 징역형을 선고했습니다. 반면 쿠데타를 주도한 신군부 세력은 권력의 요직을 차지했습니다. 이들은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통해 국가권력을 탈취하고 제5공화국을 수립했습니다. 이 사건의 진실은 김영삼 정부에서야 밝혀져, 전두환과 노태우가 사법적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사진을 누르시면 정확하게 역사를 아실 수 있습니다.

1212군사반란
1212군사반란


영화 서울의 봄.

영화 서울의 봄이 천만관객을 돌파했습니다. 24일, 영화 '서울의 봄'이 누적 관객 수 100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지난달 22일 개봉한 이후 33일 만의 성과입니다. 이는 올해 개봉한 영화 중 '범죄도시 3'에 이어 두 번째로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작품이며, 전체 개봉 영화 중에서는 31번째, 한국 영화로는 22번째 기록입니다. 코로나19 이후에는 '범죄도시 2', '아바타: 물의 길', '범죄도시 3'에 이어 네 번째이며, 시리즈물이 아닌 영화로는 유일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배급사에 따르면 '서울의 봄'은 첫날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후, '노량: 죽음의 바다' 개봉 전날인 이달 19일까지 28일 동안 꾸준히 1위를 유지했습니다.


영화 서울의 봄 흥행 요인.

흥행의 주요 요인으로는 배우들의 열연이 손꼽힙니다. 총 220여 명의 배우가 출연하며, 그 중 주요 인물만 70여 명에 달합니다. 황정민이 연기한 광기 어린 반란 주범 전두광 역과 정우성이 맡은 이태신 역의 강렬한 연기가 호평을 받았으며, 이성민, 박해준, 김의성 등 주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도 주목을 받았습니다. 김성수 감독의 연출력 또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영화는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시작된 군사반란의 긴박한 9시간을 생생하게 담아냈습니다. 영화 개봉 초기, 20대와 30대 관객들 사이에서 영화 관람 전후 심박수와 스트레스 지수를 인증하는 '심박수 챌린지'가 유행했습니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영화가 반란군과 진압군의 긴장감 넘치는 대립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며 근현대사에 대한 통찰을 제공했다"고 분석했습니다. 과거 '변호인'이나 '1987'처럼 현대사를 다룬 영화들이 흥행했을 때 정치권의 반응이 있었던 것처럼, '서울의 봄'도 현재의 정치 상황과 연결되어 흥행에 불을 지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뤄진 인사에 대한 야당의 반응이 영화와 연결되며 더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김형석 영화평론가는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는 그 자체의 흥행 요소뿐만 아니라 시대적 상황과의 연결 등 다양한 요인이 작용한다"며, "12·12 군사반란을 자세히 알지 못했던 관객들이 영화를 통해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이것이 사회적 공감을 이끌어내며 흥행에 기여했다"고 말했습니다. '잊혀진 역사를 배우자'는 분위기가 단체 관람으로 이어졌고, 이에 대한 사회적 논란도 흥행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 중학교의 단체 관람을 둘러싼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국회 국방위원회에서는 당시 육군본부 벙커를 지키다 숨진 정선엽 병장에 대한 훈장 추서 문제가 논의되었고, 군인권센터는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무궁화대훈장 추탈을 촉구하는 서명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윤 평론가는 "한국 영화산업에 '서울의 봄'이 큰 힘이 될 것"이라며, "이 영화가 영화 제작자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영화는 개봉 한 달이 넘었음에도 높은 예매율을 유지하고 있으며, '범죄도시 3'의 기록을 넘어서 올해 최고의 흥행작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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