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이상하게도 배우 전원주 씨의 별세 소식이 뜬 것에 대해서 의문점을 갖고 한 번 알아봤습니다. 왜 배우 전원주 선생니께서 별세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지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배우 전원주 별세 소식.
검색을 해서 알아보니까 유튜버 중에 가짜뉴스를 만들어서 유통하는 사람 때문에 배우 전원주 별세라는 키워드가 검색노출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보통 이런 가짜뉴스 때문에 과거에도 별세 소식이 이슈가 된 적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가 안되는 콘텐츠 제작으로 보입니다.
배우 전원주의 인생.
전원주는 대한민국의 유명한 배우이자, 전 국어 교사 및 성우로도 활동했던 다재다능한 인물입니다. 그녀는 1939년 9월 20일 경기도 개성부에서 태어나, 인삼 농사를 지으며 부유하게 자랐습니다. 하지만,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며 그녀의 가족은 남한으로 피난을 와야만 했고, 이로 인해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이때 그들이 정착한 곳은 인천이었으며, 전원주는 초등학교 5학년까지만 다닐 수 있었습니다. 피난 생활로 인해 정규 교육을 이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전원주의 가족은 이후 다시 안정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억척스럽게 돈을 모아 사업에 성공했고, 전원주는 중학교 2학년으로 편입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학교 측에서 그녀의 편입을 거절했지만, 교장선생님의 설득 끝에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공부에 열중해 졸업식 때 상까지 받는 성취를 이뤘습니다.
숙명여자대학교에 진학한 배우 전원주
그녀의 학창 시절은 1950년대 말이었는데, 당시 대한민국의 대학진학률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습니다. 특히 여성의 대학 진학률은 남성에 비해 훨씬 낮았고, 남녀차별이 심각한 시대적 배경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원주는 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그녀는 당시 사회에서 엘리트로 간주될 수 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전원주는 교사로서의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성우와 배우로서의 길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방송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키가 작아 칠판에 글씨를 쓰기 힘든 것이 배우로 전향하는 한 이유였습니다. 물론 이는 웃자고 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실제로 그녀는 이 문제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더욱 충격적인 사건은, 한 훈육주임이 여학생들을 줄 세워 놓고 차례로 뺨을 때리다가 전원주를 학생으로 오해해 그녀에게도 폭력을 행사했던 일입니다. 이 사건은 그녀가 교사 직을 그만두고 성우로 전향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1960년 성우로 데뷔합니다.
1972년 배우로 활동 시작한 배우 전원주
1972년에는 본격적으로 배우로 전향했습니다. 배우가 된 후에는 오랜 기간 동안 무명 생활을 겪었습니다. 당시 방송계에서는 그녀의 외모를 이유로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녀는 식모 역할을 맡았고, 심지어 58세 때에는 한 드라마에서 매춘부 역할까지 맡기도 했습니다. 주인공의 어머니 역할을 맡았을 때조차도, 가난한 설정 때문에 식모나 비슷한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고, 비단 치마를 입고 연기하는 것이 그녀의 꿈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 PD의 제안으로 비단 치마를 입는 역할을 맡게 되었지만, 그것은 무당 역할이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중후반, 개그우먼 김미화의 추천으로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면서 그녀의 인기는 급상승했습니다. 코미디 프로그램 '코미디 세상만사'의 '사미인곡' 코너에서 부잣집 푼수 아줌마 역할을 맡아, 호탕한 웃음소리와 독특한 유행어로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녀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광고에 주연으로 출연하게 되었고, 드라마에서도 더 많은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 특히 부잣집 부인 역할을 맡으며 그녀의 연기 범위를 넓혔습니다. 그녀가 출연한 인기 드라마들은 전원주 덕분에 더욱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전원주는 억척스럽고 생활력 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신혼 시절부터 사용한 냄비를 여전히 사용할 정도로 알뜰한 성격입니다. 실향민 출신으로 어린 시절에 많은 고생을 겪었으며, 이로 인해 그녀의 키는 작고 몸도 왜소합니다. 전원주의 가정생활은 행복과 시련이 공존했습니다. 28세에 부모님이 정해준 남자와 결혼했는데, 그는 영등포 일대에서 유명한 의사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첫 번째 남편과의 결혼 생활은 2년 만에 아들을 낳았지만, 남편은 폐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번째 남편은 재혼남이었고, 전원주는 아들들이 재혼으로 인해 상처받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남편은 난봉꾼으로 사업을 하며 친가와 처가의 돈을 탕진했고, 외도로 인해 가족 부양은 전원주의 몫이 되었습니다. 2013년에 두 번째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여자들이 장례식에까지 참석했다고 합니다. 전원주는 일하느라 가정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지만, 2015년 여름 아들과 중국 여행을 다녀오며 관계를 회복했습니다.